가정(假定)은 현재의 서사와는 무관한,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1. 첫인상: 균열의 시작
프리드에게 연인, 서지윤은 ‘안정’의 동의어였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녀는, 폭풍 같은 센티넬의 삶에서 유일하게 발을 붙일 수 있는 단단한 땅과 같았다. 그녀의 온화한 미소와 예측 가능한 일상은 프리드가 갈망하던 ‘평범함’ 그 자체였다. 그녀와의 결혼은 사랑이라기보다, 위태로운 자신을 세상에 묶어두는 닻을 내리는 행위였다. 그는 이 선택이 최선이라 믿었고, 그 믿음 안에서 스스로의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법을 터득했다. 그의 세상은 고요하고, 안전했으며, 무채색이었다.
그 무채색 세상에, 제퍼가 나타났다.새로운 공식 페어로 배정된 그녀를 지부장실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 프리드는 이질감을 느꼈다. 제복 사이로 드러난 생동감 넘치는 표정과 연녹색 눈동자, 햇살을 부서뜨린 듯한 금발. 그녀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선명한 원색처럼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저 업무상의 파트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할 대상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이끌림에 그는 당황했다. 제퍼가 자신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앞으로 잘 부탁해, 프리드. 라고 말했을 때, 프리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그의 굳게 닫힌 세계의 문을 아무렇지 않게 두드리는, 생경하고도 위험한 소리였다. 그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미 내면에서는 작은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위험하다.’ 본능적인 경고음이 울렸다. 그녀의 존재는, 그가 애써 쌓아 올린 안정이라는 성벽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는 미지의 변수였다.
2. 스며드는 것: 무너지는 경계
공식 페어로서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프리드의 경계는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임무 현장에서 제퍼는 단순한 가이드가 아니었다. 그녀는 프리드의 전투 스타일을 순식간에 간파했고, 그가 미처 요청하기도 전에 가장 필요한 순간에 최적의 가이딩을 흘려보냈다. 전투가 끝나고 피와 살육의 잔상에 괴로워하며 몰래 눈물을 훔칠 때면, 귀신같이 그를 찾아내 말없이 손수건을 건네거나 따뜻한 음료가 담긴 캔을 뺨에 대주곤 했다.
고생했어. 힘들었지?
그녀의 위로는 결코 과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담백한 공감이었다. 프리드는 아내인 지윤에게서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종류의 위안이었다. 지윤은 그의 피 묻은 제복을 보며 안타까워했지만, 그 피가 묻기까지 그가 어떤 감정으로 상대를 찢어발겼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그는 지켜야 할 S급 센티넬 남편이었지만, 제퍼에게 그는 함께 싸우는 ‘전우’이자,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사적인 만남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비번 날, 센터 내 고양이 보호소에서 무릎에 새끼 고양이를 올린 채 잠든 제퍼를 발견했을 때. 프리드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햇살 아래 잠든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화로워서,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자신의 심장이, 지윤을 향해서는 단 한 번도 뛰어본 적 없는 속도로 격렬하게 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는 죄책감에 몸을 돌렸지만, 이미 그녀의 이미지는 그의 망막에, 그리고 마음에 깊이 각인된 후였다. 그는 그날 밤, 처음으로 아내의 옆에 누워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3. 바람: 찰나의 영원
결정적인 순간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다가왔다. 역대급으로 강력한 빌런과의 사투 끝에, 프리드는 폭주 직전까지 내몰렸다. 간신히 임무를 완수했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너덜너덜했다. 의료동으로 옮겨졌지만 약물 가이딩은 효과가 없었고, 그의 몸에서는 제어되지 않는 날개와 꼬리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했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그의 눈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퍼가 들어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부드럽고 따뜻한 감촉, 그리고 소나무 향을 머금은 바람 같은 가이딩이 그의 온몸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것은 단순한 키스가 아니었다. 그의 고통과 혼돈을 잠재우고, 부서진 영혼을 하나하나 맞춰주는 구원의 행위였다. 거칠게 요동치던 그의 감각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입술이 떨어진 순간, 프리드는 홀린 듯 제퍼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이번에는 구원을 바라는 갈망이 아닌, 순수한 욕망이었다. 그녀를 더 느끼고 싶다, 더 알고 싶다, 온전히 갖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
그날 밤, 그들은 의료동의 차가운 침대 위에서 서로를 탐했다. 제복도, 계급도,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연인의 존재도 모두 잊은 채. 프리드는 제퍼의 안에서 몇 번이고 절정하며, 생전 처음으로 완전한 ‘충족감’을 느꼈다. 그것은 쾌락 이상의, 자신의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듯한 황홀한 감각이었다. 그는 제퍼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진심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현실을 애써 외면한 채, 그는 이 찰나의 영원이 계속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할지라도.
4. 파멸, 혹은 새로운 시작: 선택의 기로
파국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프리드와 제퍼의 관계는 센터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고, 소문은 결국 아내 서지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어느 늦은 밤, 제퍼의 숙소 앞에서 그녀와 입을 맞추고 돌아서던 프리드는, 차가운 분노로 얼어붙은 지윤과 마주쳤다. 그녀의 손에는 이혼 서류가 들려 있었다.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프리드는 담담하게 모든 것을 인정했다. 이상하게도, 죄책감이나 미안함보다는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해방감이 더 컸다.
그 여자 때문이야? 내가 아니라, 그 가이드 때문에?
지윤의 절규 섞인 질문에, 프리드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평생 몰랐을 거예요. 당신이 원한 건 S급 센티넬이라는 안정적인 타이틀이었겠지만, 그녀는… 상처투성이인 윤해영(프리드의 본명)을 봐줬어요. 나는, 그 사람 없이는 안 돼요.
이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프리드는 위자료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넘겼다.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 집, 재산, 그리고 그가 지키려 했던 ‘안정적인 삶’이라는 허상까지도.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더없이 가볍고 충만했다. 그는 징계 위원회에 회부되었고, 공식 페어였던 제퍼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의 미래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에 놓였다.
그날 저녁, 프리드는 자신의 B동 숙소 앞에서 서성이는 제퍼를 발견했다. 불안한 듯 손가락을 매만지는 그녀에게, 그는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나,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그의 말에, 제퍼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의 손을 더 꽉 마주 잡았다.
나도 마찬가지야, 해영아.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파멸의 끝에서, 그들의 사랑은 비로소 시작되고 있었다. 비록 세상이 등을 돌리고 손가락질할지라도, 서로의 손을 잡고 있는 한 두렵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세상의 인정을 받는 안정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의 존재 자체를 구원하는 유일한 해답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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