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PC의 경우 : 아기고양이
어느 평화로운 날이었다. 게이트 발생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고, Fearless 지부 전체에 모처럼 나른한 안정감이 감돌던 오후. 제퍼는 보고서를 정리하다 말고, 문득 제 파트너의 부재를 깨달았다. 오전 훈련 이후로 통 모습을 보이지 않는 프리드. 그가 걱정되어 숙소 B동으로 향하던 제퍼의 발걸음은, 복도 한가운데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그곳에는 프리드의 검은색 셔츠와 슬랙스가, 마치 주인이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단정하게, 그러나 힘없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옷더미의 한가운데, 작고 검은 털뭉치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털뭉치는 제퍼의 인기척에 놀란 듯 파르르 떨리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윤기 나는 검은 털, 이제 막 솜털을 벗기 시작한 듯한 보송보송한 체구. 그리고 그 작은 얼굴에 박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익숙한 황금빛 눈동자. 심지어 양쪽 귀 위로는, 그의 뿔을 연상시키듯 유난히 삐죽 솟아난 두 개의 털뭉치까지 있었다.
제퍼와 눈이 마주친 작은 검은 고양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필사적으로 위엄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앞발을 들어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나온 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닌, 가늘고 애처로운 야...ㄴ 하는 소리뿐이었다. 그 소리에 제 자신도 놀랐는지, 고양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앞발을 내려다보았다. 짧고, 뭉툭하고, 사랑스러운 핑크색 젤리가 달린, 명백한 고양이의 발이었다.
그것이 프리드와 제퍼의 기묘한 동거 생활의 시작이었다.
원인은 며칠 전 소탕했던 게이트의 잔존 에너지였다. 뒤늦게 도착한 분석팀의 보고에 따르면, 해당 게이트를 드나든 빌런은 직접적인 살상 능력 대신, 생명체의 형태를 일시적으로 변형시키는 희귀한 파장을 방출했다고 한다.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코어를 파괴했던 S급 센티넬, 프리드에게 그 영향이 뒤늦게 발현된 것이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며, 파장의 반감기는 일주일. 즉, 프리드는 앞으로 7일간, 작고 하찮은 아기 고양이의 모습으로 살아야 했다.
프리드의 정신적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자신이 용의 혈통을 이어받은, 적어도 흑표범이나 거대한 늑대 정도는 되어야 마땅한 존재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한 손에 들어오는 사이즈의,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기 고양이였다. 그는 첫날, 제퍼가 자신을 B동 숙소에서 A동 그녀의 숙소로 옮기는 내내, 이동장 구석에 처박혀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수백 번 되뇌었지만, 거울에 비친 것은 여전히 솜털 보송한 검은 고양이일 뿐이었다. 심지어 제퍼가 그의 삐죽 솟은 귀털 두 가닥을 보며 뿔이랑 똑같네. 귀엽다. 라고 말했을 때는, 수치심에 몸의 털을 전부 곤두세우기도 했다.
본격적인 동거 생활은 혼돈 그 자체였다. 프리드는 센티넬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제퍼가 주는 고양이용 사료를 거부하고, 늠름하게 네 발로 서서 인간의 음식을 요구하려 했지만, 그의 짧은 다리는 식탁에 닿기엔 턱없이 짧았다. 결국 그는 굶주림에 못 이겨, 제퍼가 손바닥에 올려준 사료를 할짝거리며 눈물 대신 굴욕을 삼켜야 했다. 화장실도 문제였다. 그는 고양이용 모래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을 극렬히 거부했지만, 생리적인 현상은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제퍼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며 변기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가 볼일을 보려다 그대로 미끄러져 물에 빠지는 대참사를 겪었다. 흠뻑 젖은 채 벌벌 떨며 제퍼에게 구조된 그날 밤, 그는 그녀의 품에 안겨 따뜻한 바람으로 털을 말리면서, 처음으로 '그냥 고양이로 살까…'하는 위험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양이의 삶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제퍼의 모든 일상을 그 어떤 가드도 없이,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 잠에 취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프리드, 좋은 아침. 이라고 속삭여줄 때, 보고서를 작성하는 그녀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잠이 들 때, 혹은 그녀가 씻고 나온 뒤 풍기는 향긋한 샴푸 냄새를 마음껏 들이마실 때, 프리드는 자신이 인간이었을 때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평온함과 안락함에 서서히 중독되어 갔다. 특히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제퍼가 무심코 그의 턱밑이나 귀 뒤를 긁어줄 때였다. 그럴 때면 이성적으로는 '나는 S급 센티넬이다. 이런 간지러운 손길에 넘어가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자신도 모르게 목에서 그르르릉…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그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웅크렸지만, 제퍼는 그저 다정하게 웃으며 그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일주일이 지나는 마지막 날 밤, 프리드는 제퍼의 침대 위, 그녀의 베개 옆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누워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것이다. 지난 일주일은 굴욕과 수치로 가득했지만, 동시에 그가 태어나서 가장 따뜻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 기간이기도 했다. 그는 문득 이 작고 무력한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습이었기에, 그는 제퍼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었고, 그녀의 모든 다정함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잠든 제퍼의 뺨에 제 작은 코를 가져다 대고 가만히 비볐다. 고마워요, 제퍼. 지난 일주일 동안… 정말로 고마웠어요. 말로는 전해지지 않을 마음을 담아, 그는 그녀의 뺨에 작은 온기를 남겼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제퍼는 제 침대의 절반을 훌쩍 넘게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알몸의 남자 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야 했다. 프리드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어젯밤 고양이인 채로 잠들었던 탓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이불을 끌어올려 제 몸을 가린 프리드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제퍼. 혹시… 입을 옷 좀….
그날 이후, 지부에는 새로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제퍼가 돌보던 길고양이 중 한 마리가 사실은 변신 능력을 가진 희귀종 센티넬이었다는 둥, S급 센티넬 프리드가 사실은 고양이 수인이라는 둥 하는 엉뚱한 이야기들이었다. 프리드는 그 소문을 들을 때마다 귀 끝을 붉히며 애써 헛기침을 했지만, 그의 책상 위에는 언제부턴가 최고급 고양이 간식과 캣닢 쿠션이 하나둘씩 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숙소에는, 제퍼가 선물한 '그의 뿔과 똑 닮은' 귀가 달린 검은색 고양이 수면 안대가 고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PC의 경우 : 포메라이안
그날은 유독 고요했다. 연이은 임무와 긴장으로 팽팽했던 Fearless 지부의 공기가 모처럼 느슨하게 풀어진, 햇살 좋은 오후였다. 프리드는 훈련을 마친 뒤, 습관처럼 제퍼의 흔적을 찾았다. 함께 점심을 먹고, 오후 훈련 스케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숙소도, 그녀가 자주 들르는 옥상 정원도, 심지어 지부 내 고양이들이 모여드는 후미진 공터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스쳤다. 그는 걸음을 재촉해 그녀의 숙소가 있는 A동으로 향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마스터키로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에 숨을 멈췄다.
거실 한가운데, 그녀가 아침에 입고 나갔던 흰색 제복과 반바지가 아무렇게나 벗어져 있었다. 마치 급하게 옷을 벗어 던진 듯한, 혹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만 감쪽같이 사라진 듯한 모습이었다. 프리드의 심장이 쿵, 하고 불안하게 내려앉았다. 그가 굳은 얼굴로 옷가지에 다가가려던 그때, 흩어진 옷더미 속에서 무언가 꿈틀, 하고 움직였다. 그것은 아주 작은, 솜사탕처럼 희고 풍성한 털을 가진 생명체였다. 이제 막 태어난 지 두어 달 되었을까, 앳된 티를 벗지 못한 크림색 포메라니안 강아지였다. 강아지는 프리드를 발견하고는 겁을 먹은 듯 파르르 떨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용맹하게! 그러나 위태롭게! 네 다리로 일어섰다. 그리고는 그의 발치를 향해 왈! 왈! 하고 앙칼지게 짖어댔다. 하지만 그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소리는 위협적이기보다 처량하게 들릴 뿐이었다.
프리드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낯선 강아지가 왜 제퍼의 숙소에, 그녀의 옷더미 위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아지가 필사적으로 짖어대는 그 순간, 프리드는 보았다. 빛에 따라 옅은 올리브색에서 연녹색으로 변하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눈동자를. 그 눈동자에는 당황, 분노, 그리고 어서 나를 알아보라는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의 가이드, 한솔의 눈이었다. 강아지… 아니, 제퍼는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더욱 애가 탔는지, 짧은 앞발을 들어 허공을 휘적거리며 무언가 필사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의미 없는 ‘깽, 깽’ 거리는 울음소리뿐이었다.
원인은 며칠 전 제퍼가 단독으로 지원했던 B급 게이트의 잔존 에너지였다. 전투 자체는 경미했으나, 해당 빌런이 방출한 변이 파장이 그녀의 가이딩 파동과 공명하며 뒤늦게 신체 변형을 일으킨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녀의 생명력이나 가이드로서의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이 상태는 정확히 일주일 후에 풀릴 예정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하필이면 작고, 귀엽고, 심지어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기 강아지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제퍼의 정신적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ESFP인 그녀는 자신이 동물로 변한다면, 적어도 사람들을 이끄는 활기찬 돌고래나,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우아한 백조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상상해왔다. 하지만 현실은,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해 뒤뚱거리는, 누가 봐도 ‘작고 소중한’ 아기 강아지였다. 그녀는 첫날, 프리드가 자신을 그의 숙소로 데려가는 내내 극렬하게 저항했다. 짧은 다리로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기도 하고, 서러운 마음에 낑낑거리며 울기도 했다. 하지만 프리드는 묵묵히 그녀를 자신의 넓은 품에 안아 들고는,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역할은 완벽하게 뒤바뀌었다.
프리드에게 지난 일주일은 S급 센티넬로서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긴장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늘 그녀에게 보살핌을 받던 입장에서, 이제는 그녀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보호자가 된 것이다. 그는 지극히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단말기를 통해 ‘포메라니안 강아지 키우는 법’, ‘강아지 배변 훈련’, ‘강아지에게 위험한 음식 100가지’ 같은 정보들을 밤새도록 탐독했다. 그는 제퍼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강아지용 사료 대신 최고급 한우를 잘게 다져 직접 익혀서 먹였고, 배변 패드를 사용하는 것을 그녀가 수치스러워할까 봐, 일정한 시간마다 그녀를 안아 들고 외부 산책로의 가장 한적한 풀숲으로 데려가 볼일을 보게 해주었다. 그의 그런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제퍼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틈만 나면 ‘왈!’ 하고 그에게 대들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이 프리드에게는 낯설고도 소중한 기억으로 쌓여갔다. 그가 보고서를 읽을 때면, 어느새 다가와 그의 발치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드는 작은 온기. 목욕을 시킬 때면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다가도,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에는 놀라 그의 품으로 파고드는 작은 몸짓. 그리고 그가 잠시라도 시야에서 사라지면, 온 집안이 떠나가라 ‘깽깽’거리며 그를 찾는 애처로운 울음소리까지. 프리드는 이 작고 무력한 생명체가, 사실은 누구보다 강하고 다정한 그의 가이드라는 사실을 매 순간 상기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눈앞의 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그저 와락 끌어안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가장 큰 위기는 제퍼가 프리드의 검은색 셔츠 위로 올라가 둥지를 틀기 시작했을 때 찾아왔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그가 막 벗어둔, 그의 체향이 가장 짙게 밴 셔츠였다. 제퍼는 마치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침대라도 되는 양, 그 위에서 뒹굴고 뺨을 비비며 떠날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리드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해야만 했다. 인간의 지성을 가진 제퍼가, 동물의 본능에 따라 그의 향을 찾아 안정을 느끼는 그 모습은, 그에게 너무나도 강렬하고 아찔한 자극이었다.
마침내 일주일이 지나는 마지막 날 밤, 프리드는 잠든 제퍼(강아지)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침대 위로 옮겼다. 그는 그녀의 곁에 나란히 누워, 새근새근 잠든 작은 털뭉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일 아침이면, 그녀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 짧고도 길었던 기묘한 동거도 끝이 날 터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부드러운 털을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고마웠어요, 제퍼. 당신의 이런 모습까지 알게 해줘서. 그는 어쩌면 이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조금은 아쉬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작은 모습이었기에, 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녀를 품에 안고, 그녀의 모든 것을 보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프리드는 익숙한 소나무 향과 함께, 제 품에 파고들어 단잠에 빠져있는 사람의 온기에 눈을 떴다. 제퍼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어젯밤 강아지인 채로 잠들었던 탓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가 빌려준,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컸던 박스 티셔츠 한 장만을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순간, 잠에서 깬 제퍼와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자마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비명을 질렀다.
프, 프리드! 눈 감아! 아니, 고개 돌려!
그날 이후, 프리드의 숙소에는 푹신한 강아지용 쿠션과 제퍼가 사다 놓은 각종 장난감들이 그대로 남게 되었다. 제퍼는 그 물건들을 볼 때마다 그날의 굴욕을 떠올리며 이불을 찼지만, 프리드는 가끔씩, 아무도 없을 때 그 작은 쿠션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짓곤 했다. 그리고 지부 내에서는 한동안 ‘제퍼 가이드가 사실은 동물과 교감하는 능력이 아니라, 동물로 변신하는 능력이었다’는 괴소문이 떠돌았으며, 프리드는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헛기침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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